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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양식/강해설교

마가복음 1장 1-8절 율법을 넘어 복음으로

강해1 마가복음 1장 1-8절 율법을 넘어 복음으로

 

마가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전체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는 자신이 기록한 마가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복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사신이 가지고 오는 좋은 소식을 말합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왕위를 이을 황제 등극을 ‘복음’으로 경축하였습니다.

따라서 마가는 진정한 왕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오신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가는 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곧바로 세례 요한을 등장시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인물입니까?

 

마태복음 11:11에서 예수님은 여자가 나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고 했습니다(마11:11).

 

그런데 예수님 또 왜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셨을까요?

세레요한은 율법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선지자, 율법, 유대교의 종합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례 요한은 낙타 가죽으로 만든 ‘털옷’ 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 를 띠고

있었으며, 음식으로는 바위에서 나오는 꿀인 ‘석청’ 과 ‘메뚜기’ 를 먹으면서 다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짜로 메뚜기를 먹었다는 뜻이 아니랍니다.

 

세례 요한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갖추고 있어야 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씀이란 것닙니다.

 

낙타란 사막을 다닐 때 사람들이 말이나 자동차 대신에 타고 다니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생명수’ 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하나님의 선과 악 중에서 악에 속한 곳이라서

모든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는 것은 물 없는 사막에서

물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생명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낙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물을 가지고

사막을 다니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털’ 이란 역시 ‘말씀’ 을 뜻합니다. 낙타털은 ‘누런색’ 이지요?

그런데 [레위기]라는 성경에 보면 사람의 몸에 난 털 색깔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방법이 적혀 있는데, 거기에서 흰색이나 검은색은 깨끗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누런색은 문둥병에 걸렸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부정한 상태, 즉 깨끗한 상태가 아니므로 각자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으로 세례 요한이 누런 털옷을 입고

있다고 표현이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먹었다는 ‘석청’ 이란 바위, 즉 성경 말씀인 반석에서 나오는 꿀처럼 단 말씀,

반가운 구원의 소식을 뜻합니다.

 

‘메뚜기’ 란 오늘날과 같이 예수님은 안 보이시지만 성경 말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잠언에는 “메뚜기는 지혜롭다. 왜냐하면, 지도자가 없어도 다 떼를 지어서

한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랍니다.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다고 했는데 ‘가죽’ 이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혀 주었던 가죽옷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띠’ 란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옛 언약에 속한 백성이었습니다.

요한은 여전히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했기 때문입니다(마11:3, 눅7:19, 20).

옛 언약 백성은 메시아를 그렇게 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한은 복음적인 예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님은 율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하는 것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오실 메시아가 당신입니까? 라고 의심까지 하게 됩니다.

막1:14에 보면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후” 활동 하십니다.

이것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이 끝나자 신약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율법의 상징입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율법적입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해서 구원을 얻는 종교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금욕을 하고 율법을 잘 지키면 존경을 합니다.

율법은 사람의 수고로 지키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함정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온 사건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너희들은 정말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고발합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끝까지 지켜내어 ‘자기의’를 과시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다른 종교일수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고 합니다.

 

율법은 예수로 넘어가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을 마무리하고 율법을 넘겨주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율법)의 한계를 고백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30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라 하리라”는 말을 요한의 겸손으로

도덕화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겸손의 표현이 아닌 옛 언약 시대는 끝이 나고 새 언약 시대가 와야 한다는 종말론적

표협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다는 표현입니다.

 

율법만으로 구원받는다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율법의 마지막 선지자 요한도 예수를 의심합니다.

당신이 오실 메시아 그분입니까? 한계있는 그 율법은 예수의 신발끈을 풀지도 못합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율법이라는 징검다리가 필요합니다.

율법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가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도 소중한 것입니다.

율법은 준비하고 복음의 길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희생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속을 보지 못하고 겉에만 치중하여 종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실체는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섬긴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유대관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율법을 대표한다. 낙타털+메뚜기와 석청=율법+금욕을 뜻합니다.

 

율법과 금욕이 합쳐지면 존경을 받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성취감을 발휘합니다.

성취했기 때문에 타인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율법을 잘 지키는데 제들은 왜 저래? 하고 비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7-8절이 율법의 자리입니다.

 

세례 요한의 겸손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율법은 복음을 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자가 낳은 사람이 가장 큰 자가 요한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이다.

그 말은 그것이 율법의 position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가 선지자 요한보다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돌아봅시다!

나는 과연 율법속에 사는가? 아니면 복음속에 사는가?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인간이 행하는 것이고, 복음은 하나님이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고, 복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율법은 내가 나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고, 복음은 그분의 섬김을 받으며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늘 멍에요, 복음은 안식에 거합니다.

복음은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인간 본성은 그 은혜를 반납하고, 보이콧하고 자꾸 내 것으로 무엇인가

성취하려고 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것이 율법적 신앙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그렇게 싸웠던 다른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복음을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세상은 늘 율법으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 자체가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시대는 끝납습니다.

 

이제 복음의 시대입니다.

그 복음안에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