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강해 4 [1장 13절: 광야시험의 본질]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 들더라 (막 1:13)
지난 시간에는 성령이 우리를 광야로 내몬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 광야는 말씀에 대한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근본적인 시험은 교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이 시험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광야의 시험
광야에서의 대표적인 시험은 만나 사건이었습니다.
광야교회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라고 주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애굽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애굽에는 고기라는 더 맛있는 음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3끼 밥을 우리의 “육”을 위해 먹습니다. 이 3끼의 밥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러한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통해 우리의 영혼도 “말씀”을 먹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깨닫길 원하셨습니다.
사실 만나는 그림자이며, 실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은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이 보이는 세상이 오히려 그림자요,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실체입니다.
사실 이 세상이 광야 생활이요, 본향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실체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만 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그 우매함을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는 대단한 사건으로 취급합니다. 공관복음만 읽으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대단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른 각도로 오병이어 사건과 만나 사건을 해석합니다.
만나와 오병이어 사건을 실패한 사건으로 취급합니다.
왜 실패했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자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6:41,48,51)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으나 새로운 떡이신 예수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제자들은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라 육은 만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오병이어를 가르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고 많은 무리들이 그 표적을 보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표적속에 감추인 말씀, 즉 생명은 보지 못하고 표적자체를 쫓아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자 쫓아오던 무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마태복음 4장의 시험도 같은 내용입니다.
첫째 시험은 돌이 떡이 되게 하는 것
둘째 시험은 성전에서 뛰어내리어 천사가 안전하게 해주는 기적을 보여줘라
셋째 시험은 천하 만국과 영광, 사탄은 즉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공통점이 모두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힘을 추구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돌을 떡으로 만드셨다면 사역이 얼마나 쉽겠습니까?
성전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린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믿지 않겠습니까?
천하 만국은 성전을 뜻하는데요, 성전의 권력을 가진다면 메시아 사역을 하기에 훨씬 수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는 이를 모두 거부하고 고난의 메시아의 길을 가셨습니다.
당시 마가 공동체도 엄청난 핍박과 고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다시 힘을 내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사탄이 요구한 기적은 거부했으나 나중에 보면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예수께서 행사하신 기적은 하나같이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지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기적을 행사하시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적을 행사하신 예수를 알리면 그들은 “힘의 하나님”으로 왜곡해서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예수가 아닌 수퍼맨 예수로 전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로마를 물리치고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슈퍼맨이었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도 예수님께 묻습니다.
“오실 메시아가 당신 맞습니까?” 왜 이렇게 묻습니까?
예수님의 행동이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옛 언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이 땅에 천년왕국을 건설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철학/인문이 모두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인류는 끊임없이 진화하여 결국은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인류도 결국 과학의 발전으로 영생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육신은 죽어도 마음을 컴퓨터에 이식하여 영생하는 방법도 연구 중에 있습니다.
영국의 노령화 연구가인 오브리 드 그레이 SENS연구소 소장에 의하면 생명연장 연구가 진행돼 150년에서
200년 살 사람은 이미 태어났다고 합니다.
신기술이 계속 나오면 수명 탈출속도도 빨라져 1000살까지 살게 될 날도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런 날이 올까요?
미국의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앞으로 30년 뒤인 2045년쯤이면 인류가 영생을 논할 세상이 열린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과학의 힘으로 영생하고 싶습니까? 이것이 진화론적 사상입니다.
진화론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이런 진화론의 물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철저하게 보이는 것을 믿는 신조입니다.
또한 진화론은 철저히 적자생존, 즉 힘을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 보이는 것으로 증명하라! 사탄의 음성과 너무나 닮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진화론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말씀답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세상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깨달으라고 한결같이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은 물로 상징되어지는데요. 물은 아랫물과 윗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아랫 물을 통하여 윗물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성경이 일종의 아랫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윗물로 깨닫지 못하면 독극물이 됩니다.
아무리 성경을 100독을 하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윗물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궁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궁창은 정수기의 필터와 같습니다.
정수기는 필터는 너무 정교해서 물의 영양소까지 다 필터링한다고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진리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말씀만 필터링해서 자기에게 유익한 말씀만
섭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드라마, 책, 영화, 이 모두가 진화론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 진화론으로 읽으면 성경은 독극물이 됩니다.
이 물은 살리는 물이 아니라 쑥물(계 811), 독극물입니다. 이러한 물을 먹으면 여러분 죽습니다.
이러한 독극물에 해독제가 있습니다.
2. 해독제(쓴 물을 단물로)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 15:22)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출 15:23)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출 15:2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마라를 생수로 바꾼 곳)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출 15:25)
마라, 즉 쓴 물을 단물로 바꿔 준 것은 나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만이 낙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 낙원을 회복하는 장면을 오늘 본문은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 11:6-8: 35장 겔 34:23-28). 첫 번째 아담은 낙원에서 광야로 쫓겨났지만, 이제 두 번째 아담이 오셔서 광야를
낙원으로 바꾸십니다.
이사야와 에스겔에 보면 짐승과 사람이 함께 노는 장면이 나옵니다.
독사굴에 넣어도 뱀이 물지 않는 하나님 나라! 그렇다고 뱀이 물지 않습니까?
이것은 비유로 말한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짐승은 대부분 부정적인 이미지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의 짐승들을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들짐승(데리온)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마음 안에 오면 그 짐승들은 온순한 짐승이 됩니다.
뱀은 더 이상 물지 않는 뱀이 됩니다. 용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무저갱에 갇히게 됩니다(계 20:1).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마가복음을 통해서 ‘내가 복음’이 아닌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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