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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양식/강해설교

마가복음강해 2 [1장 10절 하늘을 가르소서]

하늘을 가르소서

 

막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And just as he was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the heavens torn apart and the Spirit descending like a dove on him.

막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the Beloved; with you I am well pleased."

 

부흥 2000이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소서 진리의 성령님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

거룩한 불꽃 하늘로서 임하사 타오르게 하소서 주영광위해

임재라는 찬양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노래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하늘을 가르고 임하소서! 하늘의 문을 여소서!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런 표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늘을 어떻게 가릅니까? 하늘의 문을 어떻게 엽니까?

 

오늘 본문에도 하늘이 갈라졌다고 표현합니다. 영어에는 찢어졌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떻게 하늘이 찢어질 수 있을까요? 왜 성경에는 이런 표현들을 쓸까요? 단순히 자연현상을 가르키는 것일까요?

 

1. 하늘이 갈라진다는 의미

마가복음 10절 11절에서는 하늘이라는 단어가 각각 한번씩 나옵니다.

그런데 개역개정에는 하늘로 표현되어 있지만 RSV 영어 번역본에는 10절의 하늘은 복수로서

하늘들(heavens)이라 쓰여졌고, 11절의 하늘은 단수의 하늘 즉 하늘(heaven)로 쓰여졌다.

어떻게 하늘이 복수 즉 여러개 일 수 있을까요? 성경은 하늘을 삼층천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삼층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38: 쌍괄식)

 

성전은 뜰과 성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뜰은 땅의 영역이고 성전은 하늘영역입니다.

그래서 성전은 하늘과 땅을 표현합니다.

이 중에 성전은 하늘인데 하늘은 세 하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높은 지성소,

그리고 가장 낮은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휘장으로 가로 막고 있습니다.

이 휘장에는 그룹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이 휘장은 둘째 하늘로서 영적인 존재들의 영역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휘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으로 둘째 하늘이 찢어진다. 그래서 이제 지성소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둘째 하늘은 찢어져야 할 하늘입니다.

 

이것을 창세기에는 궁창으로 표현합니다. 창세기의 2째날에는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는 기사가 나옵니다.

윗물과 아랫물 사이에 궁창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윗물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는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는 물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마라’라고 부릅니다. 쓰다라는 뜻입니다. 쓴 물입니다.

마시지 못합니다. 룻기에서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너무 쓰고 쓰라려서 그렇게 불러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기에 나무를 던집니다. 그러자 단 물로 바뀝니다.

여기에 십자가 복음이 담겨있습니다.

쓴 물은 십자가를 만날 때 마실 수 있는 물, 즉 말씀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장소가 요단강인데 이 요단강도 휘장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야 지성소인 가나안을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요단강은 지성소(가나안)을 들어가는 휘장인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 궁창이 제거된 사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갈라지는 사건은

모두 십자가 사건을 가르킵니다.

둘째 하늘, 휘장, 궁창이 제거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 즉,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늘들이 찢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들이 찢어져야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2. 우리안에 있는 가짜 하늘

이 가짜 하늘은 일종의 필터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와도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듣고 싶은 음성만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을 만들고, 거짓 종교를 만듭니다.

 

예수께서 휘장을 찢으신 것은 이러한 거짓 종교를 찢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가짜의 종교를 찢어야 합니다.

그 가짜 하늘이 찢겨져야 진짜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찢겨진 가짜의 하늘 틈으로 성령님이 내려 오십니다.

가짜가 찌겨져야 진짜의 하늘에서 성령님과 하나님의 음성이 내려옵니다.

 

종교는 타인을 사랑하라고 하고, 샤머니즘은 자신을 사랑하라고 한다. major 종교는 샤머니즘에 먹힙니다.

 

원래 불교라는것은 마음의 종교요..수행의 종교요..깨달음의 종교입니다.

내마음을 다스리고 제대로 알고 수행(업을 지으는것을 방지하기에 )을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타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샤마니즘과 합쳐지자 각종재를 하고 거기다 제사까지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절에 산신각을 모시는 것은 미신이며 우상숭배입니다. 불교도 원래의 불교에서한참 멀어진 것입니다.

 

이슬람은 어떻습니까? 자살 테러한 자에게는 천국에서 엄청나게 이쁜 수많은 여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젊은 청년들이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고 자살 테러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포이에르 바하는 신학은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학이다. 신은 인간의 그림자들이다고 말합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샤머니즘에 먹힌 이유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그리스 신화는 나르시즘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잘 다독여주는 철학이 샤머니즘이다.

철저하게 “내”가 주어가 됩니다.

 

심지어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샤마니즘에 먹힌 기독교는 기복만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번영과 복을 비는 기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마라’의 물입니다. 쓰서 마시지 못하는 물입니다.

계시록에서는 그것을 쓴 쑥물(8:11)이라고 표현합니다. 타락한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에서 내어 놓는 물, 즉 말씀은 독극물인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의 말씀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오로지 성도들이 좋아하는 말만 해줍니다.

이러한 물들을 마시면 우리는 결코 윗물을 마실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가짜 하늘입니다. 또한 현대인은 진화론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학교에서, 대학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고 사회도 그렇게 돈이 최고이며, 경쟁에서 살아난 자만이

우상으로 섬겨지고 있습니다.

그 가짜의 하늘들에는 내가 믿고 내 신념으로 삼은 이데올로기, 내 전부인 내 삶의 모든 것인

나를 움직이는 가치관 세계관이 있습니다. 사실 이번 세월호 사건도 이러한 가짜 하늘들의 결과물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가짜 하늘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스마트 폰에는 수많은 거짓 정보로 우리의 가치관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사역이 점점 어려워 지는 것은 그들이 접하는 정보의 양을 비교해 보십시오.

일주일동안 말씀을 듣는 시간은 1시간도 안되며, 나머지는 거짓 정보의 홍수속에 삽니다.

그 거짓 정보는 철저하게 진화론적 사고, 계몽주의, 다원주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하나님이 거짓 하늘을 찢어 주셔야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거짓 하늘들은 존재했습니다. 그 거짓 하늘들이 우리에게 윗물, 즉 말씀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3에는 그 “진리의 말씀에 갈급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갈급한 자에게는 위에서 비를 내려 땅을 적셔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위에서 비를 내려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버트란트 러셀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성경을 100독하고 신은 잔인하므로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졌던 고정관념, 신학, 이데올로기들을 찢어내고 내려오십니다.

 

그런 가짜의 하늘들을 찢어 버리시고 진짜의 하늘에서 당신의 영과 음성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우리가 받는 복이다. 사람들이 헤아리는 복이란 그저 나 잘되기를 내가족 잘되고 성공하는 걸 복이라 하지만

진짜의 복은 내가 섬기고 있던 가짜의 하늘들이 찢어지고 진짜의 하늘에서 당신의 영을 보내주시고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받는 최고의 복입니다.

 

3. 어떤 음성을 듣는가?

그 음성이 바로 다음과 같은 음성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여러분은 이러한 음성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러한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음성은 성경을 연구해서 절대 들을 수 없는 음성입니다.

보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느냐는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거짓 하늘이 찢어져야만 가능합니다.

거짓 이데올로기, 철학, 신념, 생각들이 버려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전제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성경은 “나를 위한 책”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아들로 빚어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음성은 단지 예수님께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들어 확정되어야 할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성경의 주인공들은 모두 우리들의 모습들입니다. 때론 부족하고, 때론 넘어지고 하는...,

그러나 결국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것이 들려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모세 이야기를 읽을 때는 모세가 되어 보세요!

자신의 생각을 모두 버리고, 21C의 생각을 모두 버리고, 그 당시에 화자의 음성(의도)을 들어라!

그렇게 모든 인물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성

경의 인물을 제3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인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입니다.

2,000년전의 사건이 아니라 곧 나의 사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text로 연구하게 되면 이것은 단지 다윗,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나 이 문장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보세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음성은 바로 나를 향한 음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늘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이다.

요단강을 넘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가짜 하늘이 찢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히 그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말씀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