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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양식/강해설교

마가복음 강해 5 [1장 14절: 예수가 갈릴리로 간 까닭은?]

마가복음 강해 5 [1장 14절: 예수가 갈릴리로 간 까닭은?]

 

지난 주 우리는 13절에서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광야 시험의 본질은 말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성도는 애굽에서 벗어나는 출애굽 경험을 합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는 기적이 동원됩니다.

10가지 재앙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체험으로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기적적인 체험으로 출애굽하는 경험을 하죠. 그리고 들어가는 곳이 광야입니다.

10가지 재앙으로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10가지 계명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세워지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갑니까?

가나안으로 진격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천국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일취월장, 성공보장, 기세등등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영적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 가나안입니다.

이 가나안에서 천국을 살아내야지 영원한 천국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전쟁터입니다.

그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광야교회에서 말씀이라는 무기를 탑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항공모함과도 같습니다. 오늘도 그런 강력한 무기를 탑재하시길 바랍니다.

 

1. 그런데 가나안 땅 중에서도 예수께서 복음을 제일 먼저 선포한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은 하필 왜 갈릴리에서 먼저 복음을 선포하셨을까요?

이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가 됩니다. 왜 하필 갈릴리였을까요?

 

출애굽 이후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 땅 분배 시에 갈릴리 지역은 상대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한 지파였던

아셀, 스불론, 납달리와 잇사갈 지파에게 주어졌습니다(수19:10-48).

갈릴리 지역은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먼 북쪽 변방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소외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갈릴리 사람’으로 멸시했습니다.

갈릴리 사람이란 ‘시골뜨기’란 뜻도 있고 ‘타협한 자들’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이방인들과 섞이기도 하고, 지리상 이방인들과 너무 밀접하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 41절에서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하고 물었던 것도 이와같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런 갈릴리에 대해 B.C 700년경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 9: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갈릴리 사역을 이사야 9:1-2의 성취로 그리고 있습니다.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선지자의 예언대로 갈릴리는 새로운 시대의 중심이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마 27: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곳도 갈릴리입니다.

 

(마26: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최후의 명령을 내리신 곳도 갈릴리이다.

 

(마28:16)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2. 그렇다면 이 갈릴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태복음은 해변에 있는 갈릴리라고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땅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바다는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계시록 21장에 보면 새하늘과 새땅은 있는데 ‘바다는 없어집니다’.

이제 복음이 땅에서 바다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인의 영역이 따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이 한 단어에 복음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인에게 넘겨가는 거대한 구속사적 흐름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께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찾아오시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신학박사가 가득한 예루살렘에 먼저 가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과부는 남편이 없는 자요, 고아는 부모가 없는 자요, 나그네는 집이 없는 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개정)

 

한결같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남편이 없고, 부모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집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필요없습니다. 성경에서 부자는 단순히 물질적 부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부자를 말합니다. 자신은 구원받기에 충분한 ‘자기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부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부자 예루살렘이 아닌 비천한 갈릴리에 찾아오십니다.

갈릴리는 예루살렘 신학박사가 보기에는 창녀와 다름 없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인과도 방불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바로 ‘갈릴리인’ 이라고 폭로합니다.

창녀같은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복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바로 갈릴리에 사는 창녀였음을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드는 ‘자기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잠잠히 그분의 섬김을 받아드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 분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볐습니다(마 11:30).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러한 복음으로 안식을 누리는 오늘이 되길 소망합니다